감정은 없다 / 오영진

감정은 없다. 감정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예술가들은 종종 영감이라는 덫에 빠진다. 한번 스치고 지나간 특정한 감정을 살려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쓰지만 그것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없다. 영감은 뮤즈의 속삭임이 아니라 속임수에 가깝다.


우리가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감정에 대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명확히 기억되는 것은 감정의 대상과 그에 대한 신체적 흥분의 상태다. 사랑은 두근거리는 심장박동으로, 슬픔은 열이 오른 몸과 눈물로 기억된다. 감정은 이러한 신체적 표현들의 원인처럼 보이며 마치 존재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또한 ‘그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문장에서 보여지듯 분노는 끓어오르는 액체적인 것으로 은유된다. 분노뿐 아니라 감정 전반이 액체적인 것처럼 간주되는 경향이 있다. 감정은 출렁거리며, 메마르거나 넘친다. 이러한 은유는 우리의 몸이 일종의 그릇이며 그러한 감정을 담아 낼 수 있다는 착각을 낳는다.


그러나 ‘슬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슬퍼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감정은 언제나 그 특정한 사건과 결부되어있어 감정만 따로 생각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슬픔은 가족을 잃거나 애인이 떠나간 사건과 맞물려 있지 그 자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를 감정은 언제나 특정한 상황 속 대상을 요구한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장 메종뇌브는 “감정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영혼의 상태다”(장 메종뇌브, 『감정』, 한길사, 1999, p. 34.)라고 말한다. 감정은 대상세계와의 관계에서 취하는 주체의 태도라는 것이다. 고로 감정은 대상세계와 관계를 맺은 충실한 사건으로서만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난 네게 감정이 있어’라는 표현은 상대에 대한 분노나 애정 모두의 경우를 포괄한다. 감정은 대상에 대한 이러한 지향과 집중이 없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에서 철학자 막스 셸러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감정의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죽은 감정상태와 지향적 감정작용이 있다고 말하며, 대상이 없는 감정과 대상이 있는 감정을 구분한다. 대상이 없는 죽은 감정상태라는 것은 단순한 신체적 쾌와 불쾌의 경우처럼 조건적인 반응에 불과한 감정들이다. 이들 감정의 원인은 따져보면 헤아릴 수는 있다. 하지만 대상은 없는 셈이다. 이러한 감정에는 가치가 없다.

막스 셸러(Max Scheler)의 초상

반면 셸러는 지향적 감정작용이 “가치 일반을 어떤 범주 아래에 포섭하고자 한다면, 그것들은 관계라고 부를 것이 아니라 질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고 말한다.(막스셀러, 『윤리학에 있어서 형식주의와 실질적 가치 윤리학』, 서광사, 1998. p. 301.) “이러한 질은 근원적으로 ‘어떤 것을 감지함’ 가운데서 주어진다.” 이러한 지향성은 약삭빠른 계산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질적 도약을 이루는 이러한 감정은 오로지 순수한 열정으로서, 이성적인 명증함과는 다른 고유의 명증성을 가진다.


감정 중의 으뜸이 사랑이라고 막스 셀러는 말한다. 어떤 감정도 사랑만큼 대상을 향해서 강렬하지 않으며, 대상세계를 가치화시키지 못한다. 이러한 그의 방법론을 학자들은 기독교적 사랑에 대한 현상학적 접근이라 부른다. 그의 감정론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지 여러 종류의 감정을 구분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감정이란 본질적으로 세계에 대한 지향성의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상태’가 아니라 ‘작용’으로서 감정을 논한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앞서 감정이 없다고 서술한 이유는 감정은 ‘있음’의 차원이 아니라 ‘함’의 차원에서 논해야 한다는 것을 환기하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감정은 세계를 향한 수동성과 능동성 사이 주체의 태도의 문제다. 루돌프 슈타이너도, ‘감정’의 위계를 ‘감각지각’과 ‘의지’ 중간에 위치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감정’이란 ‘공감’과 ‘반감’의 상호작용 속에 놓인 것인데, 공감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순응-결합을 의미하며, 반감은 세계에 대한 주체의 반발-분리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퐁타니유와 그레마스가 주창한 감성의 기호학에서도 비슷한 논리가 발견된다.

"Masked Emotions (Me)" © Danny Quirk / "Unmasked Emotion (Her)" © Danny Quirk

출처: https://www.behance.net/gallery/2906635/The-Requited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양태’라고 불리우는 숨겨진 서술어의 기능이다. 양태는 크게 ‘~이다’와 ‘~하다’로 나뉘어진다. 예를 들어 ‘좋아하다’는 문장은 ‘좋다’와 ‘하다’의 결합체로 통상 ‘~하다’가 보여주는 지향성을 기호학의 문제로 사유하지 못했다는 반성을 보여준다. 마찬가지로 ‘~이다’는 수용성을 함축하는 서술어이다. 그렇다면 ‘사랑에 빠지다’와 ‘사랑을 하다’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이 두 문장은 의미적으로는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를 주고 있다. 비밀은 아마도 대상에 대해 주체가 갖는 수동성과 능동성의 함량 차이일 것이다. 사랑은 이 두 방향에서 시계추처럼 흔들거린다.


이러한 관점의 감정론은 감정이 단지 신체적 상태에 불과하다는 생물학적 환원주의나 가치가 미약한 막연한 지식에 가깝다는 주지주의의 감정론과는 다르다. 더불어 감정을 영감이나 영혼의 문제로 과도하게 신비화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러한 의견들은 감정의 역할을 너무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하고 있다. 감정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대상세계와 주체 간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사건임을 직시하자. 이러한 관계의 충실함 속에서 감정은 언어화 되는 것이다.


오영진(<에란겔:다크투어> 기획자, 교과묙 <기계비평>주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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