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까다로운 귀, ‘라디오界’의 김수영 / 임태훈



김수영의 「라디오界」(1967)는 새로 산 금성사 라디오로 이북방송을 또렷한 입체음으로 듣는 순간의 감흥을 남긴 시다. 「무허가 이발소」(1968)와 「음악의 남용」(1969) 도 비슷한 시기에 발표된 라디오와 소음에 대한 글이다.


당시는 제6대 대통령 선거로부터 삼선개헌 국민투표가 있었고, 라디오의 국민 미디어화가 상당한 단계에 진입해 텔레비전의 시대가 예고되던 시기였다. 전방위적으로 재편되고 있는 매체 환경에서 사회적 신체의 자율성을 지키고 정동(情動, affect)의 억압을 피하려 했던 시인의 싸움을 살펴보자.


김수영은 「라디오界」(1967)에서, 한때 일제의 방송 네트워크에 속했던 한반도의 과거를 생각한다. 해방 이후에도 일본 방송 전파는 한반도로 넘어들어오고 있지만 “시시한 라디오소리라 더 시시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주파수 채널 10.5에서 하이파이 입체음으로 들리는 소리는 “몸서리치이는” 불온방송인 “以北방송”이었다.

이 이상한 일을 놓고 나는 저녁상을
물리고 나서 한참이나 생각해본다
지금은 너무나 또렷한 立體音을 통해서
들어오는 以北방송이 不穩방송이
아니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지금 일본말 방송을 안 듣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무 미련도 없이
회한도 없이 안 듣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라디오界」(1967) 중)

김수영은 이북방송을 듣는 일이 일본 방송에서와 마찬가지로 시시한 소리가 될 날이 올 거라고 적었다. 식민지기의 라디오 체험에서 1960년대 남한 사회의 라디오, 반공산주의의 강박증에서 해방된 미래의 라디오가 「라디오界」에 겹쳐 있다. 시인의 귀가 탐색했던 것은 지금 당장 닿을 수 없지만, 언젠가 반드시 듣고 싶은 ‘가능한 역사’였다.


1960년대 말의 남한 사회는 식민지 시절 경성 모더니티의 한계를 넘어서서, 라디오 방송이 주도하는 미디어 전환이 전국 단위로 확장되고 있었다. 1969년의 남한 사회에는, 라디오가 202만 4천 대, 스피커 130만 7천 대, 텔레비전 21만대, 앰프는 7,466대로 524만 6천여 가구에 방송 수신기가 보급된다. 이 때문에 “거리에도 집에도 음악이 쏟아져 나온다. 콩나물시루같이 승객을 빽빽이 태우고 소음의 거리를 달리는 버스가 스피커로 방송음악을 뿌린다.”(「음악의 남용」)며 지긋지긋해하는 사람들도 늘어 갔다.



그 가운데 김수영은 유난스럽고 까다로운 한 명이었다. 그는 유행가를 크게 틀어대는 버스 운전사와 한바탕 승강이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엉뚱한 데다 화풀이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越南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어느날 古宮을 나오면서」, 1965)할 때는 정작 목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고작해야 버스 기사와 유행가 문제로 언쟁을 벌이는 그는 자칭 “自爆을 할 줄 아는 속물”(「이 거룩한 속물들」,1967)이었다.


김수영은 자신을 둘러싼 1960년대의 ‘소음’과 불화했다. 김수영은 5․16 쿠데타가 있던 날의 방송을 가장 몸서리치게 두려워했던 청취자였다. 당시 김수영은 혁명정부의 공약이 방송되는 소리를 듣고 겁에 질려 지인의 집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목격한 쿠데타’가 아니라 ‘청취한 쿠데타’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는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들은 즉시 집을 나서 김이석의 집으로 갔다. 김이석의 집이라면, 그리고 김이석의 부인인 박순녀라면 몇날 며칠이고 그를 숨겨줄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판단되어서였다. 아니 그 순간, 김수영은 판단이고 예단이고를 할 틈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라디오를 통해 “반공을 국시로 하고……”라고 외치는 5·16의 공약을 듣는 순간, 거의 무의식적으로, 김이석의 집으로 달렸을지도 모른다. (최하림, 󰡔김수영 평전󰡕, 실천문학사, 2003, 308쪽.)

최하림의 서술처럼, 그가 박정희 정권이 국민을 향해 쏟아내고 되먹임하는 미디어 현상들에 유독 민감했던 것은 당연했다. 김수영에게 그 ‘소리’는 타협할 수 없는 잘못된 역사의 침공이었다. 4·19 혁명 이후 1년 만에 닥친 군사 쿠데타였다. 반공주의와 빨갱이 콤플렉스가 온 사회를 옭아매고, 애국주의와 파시즘, 조국 근대화론이 뒤엉킨 ‘국민다움’이 새삼스러울 게 없는 정상성이 된 시대가 들이닥쳤다.

<무허가> 이발소에서야 비로소 궁색한 사색을 위한 신경휴식이 가능하게 되었으니, 사색이 범죄라고 아니 말할 수 있겠는가. 하기는 무허가 이발소에도 라디오의 소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향군무장鄕軍武裝을 보도하는 투박한 뉴스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인기배우를 모델로 한 전축광고 포스터 같은 것이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만, 그래도 수십 명의 승객들의 사전 양해도 없이 제멋대로 유행가를 마구 틀어놓는 운전사의 무지와 무례에 비하면, 무료한 이발사의 이 정도의 위안은 오히려 소박한 편에 속한다. (「무허가 이발소」(1968) 중)

무허가 이발소의 ‘소음’에서 그는 온 사방으로 전염되는 ‘근대화의 병균’을 읽는다. 라디오 가요에 이어 향군무장의 투박한 뉴스 소리가 들리는 이발소의 사운드스케이프는 이곳이 별 수 없는 박정희 정권 아래의 남한임을 지시한다. 시인이 무허가 이발소에서 들었던 향군무장에 관한 보도는 1968년 고조됐던 안보위기론을 읽을 수 있는 장면이다. 1월 21일 북한 무장 게릴라 청와대 습격사건(1·21 사건)과 1월 23일 미국 정찰군함 푸에블로호 억류사건, 10월 30일 울진·삼척 북한 무장게릴라 침투사건 등은 국내에 전쟁 재발이라는 위기감을 불러오기에 충분했고, 박정희 정권에는 위기이자 기회였다. 이 시대의 소음 속에서 그는 요설을 날렸고, 그것을 문학으로 바꾸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시를 쓰는 도중에도 나는 소음을 듣는다. 한 1초나 2초가량 안 들리는 순간이 있을까. 있다고 하기도 없다고 하기도 말하기 어려운 문제다. 이것을 말하면 <문학>이 된다. 그러나 내 시 안에 요설이 있다면 <문학>이 있는 것이 된다. 요설은 소음에 대한 변명이고, 요설에 대한 변명이 <문학>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시작 노우트 7」(1966) 중)

이 ‘소음’에 끝내 익숙해지지 않으면서, ‘소음’의 존재 자체를 따돌려버릴 수 있기를 김수영은 항상 바랐다. 그것이 그에게는 ‘문학’이었으며 정신의 망명이었다. 가장 까다로운 귀를 가진 자의 숙명이다.


임태훈(조선대학교 기초교육대학 자유전공학부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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