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학의 지성사』 리뷰: 비로소 갖게 된 우리의 한국 사회학사 / 최종렬

1980년대 중반 대학 다닐 때 사회학사 수업을 처음 들었다. 공부에 집중하기 힘든 엄혹한 시절이기도 했지만, 교재로 지정된 번역서는 읽기 어려웠다. 처음 듣는 낯선 외국학자 이름과 사회학 전문 용어가 잔뜩 들어 있는 데다가 분명 한글인데도 외국어를 읽는 듯이 헛돌고 성긴 문체가 문제였다. 무슨 뜻인 줄도 모르고 막무가내 읽다 좌절하기 여러 번. 얄팍한 독해능력을 탓하다가 문뜩 궁금해졌다. 왜 한국 사회학자가 한글로 쓴 사회학사는 없을까?


번역된 사회학사를 읽던 스무 살 청년은 어쩌다 보니 늙수그레한 사회학자가 되어 몇 년 전부터 사회학사를 가르치고 있다. 사회학사를 담당했던 선배 사회학자가 정년 퇴임해서 빈자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교재를 고르다가 대학 시절 바로 그 책이 아직도 대학에서 주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아직도! 씁쓸함이 밀려왔다. 우리말로 된 사회학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다행히 이 소망이 이루어졌다. 김덕영이 『사회의 사회학』을 출판했기 때문이다. 콩트, 스펜서, 마르크스, 뒤르케임, 짐멜, 슈츠, 파슨스, 엘리아스, 부르디외, 하버마스, 루만 등 사회학의 창건자로부터 최근 거장까지 모두 다뤘다. 이제 학생들은 우리말로 사회학자의 삶과 사상을 읽을 수 있는 큰 복을 누리게 되었다.


기쁜 마음도 잠시, 새삼 오래 묵은 질문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도대체 언제까지 외국 사회학자의 삶과 사상을 사회학사의 전부인 것처럼 가르쳐야 할까? 한국에는 뛰어난 사회학자가 없단 말인가? 문학에는 김수영과 염상섭이 있고 김현과 김윤식이 있는데, 사회학에는 아무도 없단 말인가? 문학은 선배 문학가의 삶과 작품을 기리고 평가하면서 스스로 고전을 만들어냈다.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의지할 수 있는 공동의 준거를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자율적인 문학장을 구성했다. 그런데 왜 사회학은 선배 사회학자의 삶과 작품에 그렇게나 무관심한가? 한국 사회학은 어쩜 그렇게나 자율성이 없어, 외국 사회학장을 기웃거리며 2부, 3부 리그를 자처하는가?


사회학자/작가인 정수복이 이 쓰라린 물음에 정면으로 답했다. 선배 사회학자의 글을 읽지 않고, 읽어도 인용하지 않으며, 설사 인용한다 해도 어디에서도 응답이 없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이 불편한 진실을 대놓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정수복이 한국 사회학계에서 지닌 독특한 이방인의 위치 덕분이다. 제도권 사회학의 외부에 있으면서 독립적인 연구자/작가로서 사회학계 안팎을 오가며 오랜 기간 참여 관찰을 수행했다. 십 년을 올곧이 한국 사회학사를 만들고자 씨름하더니 마침내 올해 『한국 사회학의 지성사』를 4권으로 펴냈다. 한국 사회학자가 남긴 저서와 논문을 ‘기초 사료’로 삼고 생존한 선배 사회학자와 나눈 대담을 ‘보충 사료’로 삼아 써 내려간 한국 사회학의 ‘역사’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것이다.” 시에라리온 템네족 추장이 던진 가치론적 주장이 이 책을 안내하는 지침이다.



1권 『한국 사회학과 세계 사회학』은 한국 사회학을 세계 사회학과의 관계를 통해 그 가치론적 위상을 살핀다. 한국 주류사회학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 사회학의 역사에서 시작해서 영국·독일·프랑스 사회학의 역사까지 두루 살핀다. 이렇듯 ‘중심부’ 사회학과의 관련 속에서 한국 사회학의 위상을 살피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중심부가 소외시킨 주변부 사회학,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와 동아시아의 사회학 역사까지 추적하여 한국 사회학의 위상을 상대화한다. 이어 한국 사회학 100년의 계보학을 추적하고, 왜 현재와 같이 미국 사회학에 종속된 한국 사회학이 되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이어서 한국 사회학의 지형을 아카데믹 사회학, 역사 사회학, 비판 사회학 등 세 갈래로 나누고 11명의 주요 사회학자의 학문적 삶과 업적을 기술한다. 2권 『아카데믹 사회학의 계보학』은 현재 한국 사회학계에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강단 사회학 또는 실증주의 사회학의 계보를 추적한다. 일제 강점기 진단학회의 활동을 바탕으로 한국 사회학을 대학 제도로 만든 이상백, 경성제대 사회학과를 나와 대구·경북의 아카데믹 사회학의 제도화에 기여한 배용광, 미국 사회학의 조사방법을 도입하고 한국 사회의 특성을 찾고자 농촌사회를 연구한 이만갑, 인구학의 기초를 마련하고 정책사회학의 전통을 세운 이해영, 미국 사회학의 이론과 조사방법론을 한국 사회학계에 뿌리내리게 하고 고유의 사회발전론을 펼친 김경동.


3권 『비판 사회학의 계보학』은 상아탑 안에 갇혀 가끔 정책사회학 역할을 하는 아카데믹 사회학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으며 당대 현실의 문제와 치열하게 대결한 비판 사회학의 역사를 살핀다.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여성사회학자 이효재의 분단시대의 여성학을 비판 사회학의 제일 앞자리에 놓았다. 민중사회학을 개척하고 이후 시민사회론으로 가는 길을 닦은 한완상. 자본주의 체제분석과 계급분석을 도입하여 민중·민족사회학자로 변혁운동에 실천적으로 개입한 김진균.


4권 『역사 사회학의 계보학』은 서구 사회학을 수입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린 한국 사회의 역사적 경험을 재구성하면서 한국 사회의 특성을 설명하는 역사 사회학의 계보를 추적한다. 한국의 가족과 농촌사회를 가장 기본적이고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아 평생 실증적인 사회사 연구에 몰두한 최재석. 한국의 사회현실과 역사에 바탕을 둔 실사구시적 연구를 통해 자주적인 민족주의 사회학을 발전시킨 신용하. 공리주의적 질서를 넘어서는 사회 구성에 의미의 바탕을 제공하는 초월적 가치를 통해 우리 사회의 전통과 현대를 성찰한 박영신.


이 책의 장점은 여럿이다. 우선 사회적 삶과 맞물려 있는 사회학자 개인의 전기를 작가다운 맛깔나는 이야기로 술술 풀어낸다. 한국 사회학의 역사를 이렇게 재미나게 읽어도 되는 걸까? 그래도 으뜸가는 장점은 이제 한국 사회학도 누구나 준거할 수 있는 역사를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 사회학계 전체가 제도적 차원에서 공동으로 해야 할 일을 정수복이 홀로 해냈다. 우리 모두 정수복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 이제 후학들이 이 책을 읽고 한국 사회학의 후속 연구로 그 빚을 갚아야 한다.


최종렬(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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