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조선일보의 나르시시즘과 그 진상
『조선·동아일보의 탄생』은 창간 100년을 넘긴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유년기 및 청소년기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오랜 기간 쌓아온 저자의 연구성과 중 식민지 조선에서 한글로 간행된 민간발행 신문에 관한 학술논문을 모아서 간행한 이 책은 『동아일보』, 『조선일보』의 1920년 창간과정과 상업화하는 두 신문의 핵심 인물인 김성수·송진우, 방응모의 경영권 장악, 1940년 총독부의 정책적 결정으로 폐간에 이르는 일련의 경과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또 1930년대 초반 간행되었던 『중앙일보』1의 사장 노정일에 관한 새로운 미간행 논문을 수록하고 『중앙일보』와 지령(紙齡)을 공유했던 『중외일보』·『조선중앙일보』의 경영권 이동과 폐간과정도 보여줌으로써, 사실상 식민지기 중앙의 조선인 언론의 전반을 다루었다.
다만 그럼에도 저서의 제목이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만을 가리키고 있는 까닭은 서문(「책머리에」)에서도 저자가 밝히는 바, 저자가 리뷰를 계획하고 있던 두 신문사의 100년사가 간행되지도 못하거나 엉터리로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폐간 이전의 사주들에 의해 그대로 해방 후에 속간되어 기득권 언론으로 자라온 두 신문은 책의 표현대로 ‘항일과 민족을 팔아서 정론지’가 되었다. 두 신문은 모두 분위기 가혹했던 학창시절에 한때 반항적이었던 자기 학급을 회상하며 나르시시즘에 빠졌고, 여전히 100살이 되어서도 자신이 반장으로 있던 학급 급우나 같은 교실을 썼던 선배의 의기어린 활동들을 자기 일인 양 여기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조선·동아일보의 탄생』은 분명 그들을 나르시시즘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잘 만들어진 거울이다. 문제는 ‘그들에게 직접 자신의 실체를 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느냐’이다. 그러나 그간의 역사와 이 책의 내용을 통해 지켜본 바, 애써 낙관해보더라도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두 신문은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식민지 시기의 ‘상업화’ 이상으로 오늘날 신자유주의적 ‘상업화’ 아래 자기객관화 기능이 마비된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의 방법은 이들이 정상화하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조건을 만드는 것이며, 두 신문의 과거와 현재를 제대로 인식하는 독자들에 의해서만 그 변화를 위한 일말의 가능성이 생겨날 것이다. 이에 두 신문사들의 자기 역사서 보다 식민지기 언론의 역사를 제대로 다루는 이 책을 많은 독자들이 보고 잘 독해한다면, 한국 언론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저자의 논문을 보면서 그 주장에 공감하며 길잡이로 삼아 온 후속세대 연구자로서, 비판의 날을 세운 서평을 쓰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탄 채, 어깨를 허락한 거인에게 감사와 겸양 대신 투정을 부리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왕에 서평을 작성하게 된 마당에서야, 서문을 통해 “학계의 날선 비판과 풍부한 토론을 기대”한다는 저자와 후속세대 연구자의 미숙하지만 날 것 그대로인 서평을 의뢰한 한국연구원의 요청에 응하여 평자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이에 로만 롤랑과 안토니오 그람시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 준 “지성의 비관주의,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어구를 되뇌는 연구자로서, 가지고 있는 모든 지성적 역량을 애써 ‘비판’쪽으로 기울여본다. 혹 과녁을 벗어난 비판의 화살이라면 이는 비판에 경도된 미숙한 사수의 역량부족에서 비롯된 것이니, 저자와 편집자, 독자들께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린다.
편집체제의 작은 아쉬움
먼저, 애써 찾아본 이 책의 첫 번째 아쉬움은 편집체제의 한 부분에 있다. 인용문이 한글 고문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4장을 제외한 나머지 5장의 본문은 이미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들로, 추정컨대 단행본 간행은 저자가 그간의 연구성과를 정리하고 그 내용을 대중에게 더욱 가깝게 알리려는 의도 역시 컸으리라 생각된다. 상세한 각주의 내용과 자료에 직접 접근하는 방법 안내, 그 외에 가독성을 고려한 친절한 편집은 그러한 의도의 반영으로 보이는데, 그럼에도 인용문이 유독 고문체인 것은 ‘옥의 티’이다. ‘원문의 느낌’도 중요하지만 오히려 ‘원문 그 자체’의 맛을 직접 보려는 독자들은 이미 원문을 찾아갈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친일신문-항일신문 프레임의 극복 방향 : 벗어둔 낡은 안경과 새로운 안경
본 저서에 수록된 일련의 연구성과들은 기존 연구성과와 사사(社史)류에서 확인되는 친일-항일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다루고자 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식민지 조선의 역사에 대해서는 지배-저항이라는 이분법적 사고의 탈피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 이분법적 사고의 극복에 대해서는 일반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다만 이 지배-저항의 사고를 극복하기 위해 취하는 방식은 연구자마다 상이한데, 저자는 대체로 그 오래된 렌즈를 낀 안경을 벗는 방법을 택했음을 독자에게 전한다.
그 결과로, 저자는 두 신문이 확실히 체제협력적 논조를 보이게 되는 중일전쟁 또는 일장기 말소사건 이전의 ‘때론 저항적이며, 때론 순응적인 태도’를 두 신문의 사주·경영진이 확고한 경영권을 유지하게 된 이후의 상업화 경향으로 파악한다. 또 폐간과정을 총독부 정책에 대한 자발적 협력이나 굴종적 순응 차원으로만 보지 않고, 그 과정을 세밀하게 재현함으로써 두 신문이 보인 태도의 편차 및 『조선일보』 내부 구성원 사이의 입장차를 밝힌다. 『중앙일보』의 창간 역시 단순히 총독부의 정책에 따라 하향식으로 생겨난 친일어용신문으로 보던 안경을 벗겨내면서, 사장 노정일의 활동을 적극적 동화주의자가 정치인 사이토와의 교섭을 통해 『매일신보』를 대체하려한 시도로 파악하고 그럼에도 그 결과물은 노정일과 다른 성향의 집필진들의 존재로 인한 애매모호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한 쪽만 잘 보이는 낡은 안경을 쓰고 본 이전의 역사상 보다 안경을 벗고 본 세상은 복잡다단했을 역사적 실제에 한 발자국 더 근접한 것이다. 따라서 저자가 그러했듯 해묵고 흠집 많은 안경을 벗어내는 일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에 있다. 안경을 벗은 채 보아도 여전히 협력, 순응, 변용 등 각각의 내부에 또 다른 스펙트럼을 가지는 여러 태도, 입장들과 더불어 지배, 저항의 모습들이 마찬가지의 다양한 표정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렴풋이 보이는 표정까지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또 다른 안경이 필요한 것이다.
분명 저자도 이런 표정들을 놓치거나 지우고 있지 않다. 이 책에서도 각 신문사 내부의 다층적 구성과 그들이 지닌 각자의 입장·태도 본문의 곳곳에서 표현되고 있다. 저자도 이미 상이 또렷이 보이는 또 다른 안경을 통해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를 비판적으로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은 또 다른 의도적 오독과 왜곡을 경계하기 위함이다. 가령 낡은 렌즈의 안경을 벗었다는 사실을 객관성을 담보하는 전가의 보도로 활용하면서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 기본적으로 작동하는 지배-저항의 논리마저 배제하려는 시도나, 중일전쟁 이후 식민지 조선의 공적 공간에 깔려있는 순응과 협력의 맥락은 지워버리고 폐간과정에 나타나는 총독부와 『동아일보』, 총독부와 『조선일보』 사이의 관계를 저항 또는 적극적 대응으로만 짝 짓는 상황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평자가 보기에 저자가 자신의 새로운 안경을 독자들에게 소개해주는 부분에 있어서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상품으로서의 ‘조선’과 ‘민족’
한편, 또 다른 아쉬움은 이 책만으로는 1933년 이후 두 신문의 상업화가 끼친 지면의 질적 변화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물론 광고지면의 증가를 수치로 증명하고, 관련된 기존 연구성과를 통해 단순한 사실위주의 보도중심주의 및 문화·오락 기사의 증가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상업화 과정 속에서 나타나는 비판적 기사를 “저항이라기보다 일본과 구별되는 존재로서 ‘조선’ 또는 ‘민족’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핵심 상품’으로 지적한 탁견을 구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 점은 몹시 아쉽다. 앞선 시기 저항적 의식의 기자들이 표현한 ‘조선’과 또 다른 상품으로서의 ‘조선’의 차이가 무엇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측면에서 제국일본 속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와 같은 시기 『조선중앙일보』는 어떤 신문이었는가를 조망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 부분은 아직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부분이기에, 식민지기 언론사를 비롯하여 인접한 여러 학문의 공통된 과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이나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 생각한다.
애써 “지성의 비관주의”로 이 책을 비판했으니 또 한 번 후배 연구자에게 귀감이 되어준 저자에게 존경을 표하면서, 동시에 “의지의 낙관주의”로서 평자 개인적으로도, 학계로서도 이러한 과제를 해결해 나갈 내일을 기대하며 글을 끝맺고자 한다. 이 책을 제대로 독해한 많은 독자대중들과 함께 그 날을 맞이한다면 아마 언론 지형도 지금 보다는 좀 더 나아져 있을 것이다.
*1965년 이병철에 의해 간행된 오늘날의 『중앙일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오늘날 기득권 언론의 대표적 언론이 ‘조중동’이라 일컫는 세 신문인 까닭에 혹시 모를 오해를 줄이고자 각주로 설명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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