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주름들』 리뷰: 일렁이다 / 조강석

공가능성이 여러 갈래로 펼쳐지는 양상을 주름들(folds)로 표현한 것은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개체의 내재성이 주어진 조건들 속에서 재배치되어 펼쳐지는 양상을 주름에 빗댄 것은 질 들뢰즈였다. 라이프니츠를 읽으며 들뢰즈가 펼쳐보이려고 했던 것은 사건의 주름들이었다. 같은 구성요소들로 재배열된 물질들의 여러 겹의 자기전개 양상이 곧 주름이다. 그리고, 마치 기억의 천재 푸네스의 회상 속에서 분초(分秒)가 미분되며 세계가 확산하듯이, 어떤 조응은 주름들을 활성화시킨다.

예술이란 얼마나 많은 주름을 거느리고 있는가.
우리 몸과 영혼에도 얼마나 많은 주름과 상처가 있는가.
주름과 주름, 상처와 상처가 서로를 알아보았고
파도처럼 일렁이며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였다. (나희덕, 『예술의 주름들』, 2021, 마음산책, ‘책머리에’에서)

위에 인용한 나희덕 시인의 말은 고스란히 예술의 정동적 효과와 통한다. 물론 정동이니 정동적 효과니 하는 말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폭넓게 지시하는 의미에 대해서는 곱씹으며 반추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이미지로 표현한 것을 개념으로 푸는 일은 이 책의 독서에 그다지 실익을 주지 못하니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폴란드 시인 아담 자가예프스키의 시의 한 대목을 이 맥락에 잇대어 놓는 것이 무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
위안이 있다, 타인의
음악에서만, 타인의 시에서만,
타인들에게만 구원이 있다.
(아담 자가예프스키, 「타인의 아름다움에서만」에서, 여기서는 『예술의 주름들』, 245-246쪽에서 재인용)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타자와의 만남으로부터 생성되는 주름들에 대한 기록이다. 아니, 앞서 인용한 대목을 원용하자면, “파도처럼 일렁이는”이라는 이미지로 요체를 대신하는 것도 좋겠다. 모든 만남은 파도처럼 일렁이는 것, 다시 말해 한 운동이 또 다른 운동을 만나 접촉면에서 파쇄되고 재배열 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물리적이며 심리적인 사건이다. 그러니 정동과 주름이라고 쓰고 만남과 생성이라고 읽어야 마땅하다. 나희덕은 예술이란 만남과 생성의 사건이 아니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예술의 주름들』은 저 일렁임의 기록이다.


<Le Pli (the fold)>(2019-21) by carel lanters

이 책은 “감각을 일깨우는 시인의 예술 읽기”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일렁임이 주인공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시인이 다양한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남긴 수상록(隨想錄)이라면 정보와 인상의 전달이 주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해 감상평이 주가 되는 책은 어떤 인계를 목적으로 하기 마련이다. 물론 이 책 안에서도 인계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민중의 삶을 다룬 판화로 널리 알려진 케테 콜비츠의 삶에 얽힌 비극적 일화들, 여인의 초상들로 기억되는 화가 마리 로랑생의 삶의 일대기, 행위 예술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연인과 각기 만리장성의 반대편 끝에서 출발하여 조우한 일화와 그 직후의 이별, 그리고 헤어진 뒤 22년 만에 응시의 퍼포먼스 도중에 재회한 사건 등과 관련된 정보를 우리는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다.


장민숙, <산책> 2009

그런가 하면, 나희덕 시의 애독자들에겐 예컨대, 시 「창문성」이 장민숙 화가의 반구상 풍경화 〈산책〉이 준 영감에 힘입어 바슐라르적 상상력을 전개한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시오타 치하루의 〈Between Us〉 전시회를 감싸는 붉고 자욱한 세계의 이미지가 나희덕의 「붉은 거미줄」을 이해하는 아리아드네의 실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은 이 책의 발단에 어떤 동기가 놓여 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내가 상상했던 이미지가 다른 예술가에 의해 물질적 형태로 구현된 것을 목도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그 낯선 예술가가 마치 영혼의 쌍생아처럼 각별하게 여겨진다. (중략) 이리도 닮아 있다니!(『예술의 주름들』, 100쪽)

발단은 이처럼 닮음으로부터일 것이다. 그러나 절정은 닮음으로부터 감응에로, 즉 한 예술로부터 시인에게로 그리고 다시 독자에게로 연쇄되는 감응을 통해서 일어날 것이다. 과연 나희덕 시인은 “이 책은 문학이 아닌 다른 예술 언어에 대해 내 안의 시적 자아가 감응한 기록이다”(‘책머리에’)라고 말하고 있거니와, 그 감응은 단지 한 예술 작품과 시인의 시적 자아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일렁여 독자와의 사이에서도 발생한다. 필자에게서 그 파고가 가장 높았던 곳은 롤랑 바르트의 『애도 일기』와 한설희의 사진집 『엄마, 사라지지 마』를 경유하여 나희덕 시인 자신의 일화를 들려주는 대목이었다.


‘어머니Mère’대신 ‘엄마Maman’라는 말을 새겨 넣으며 “나의 롤랑, 나의 롤랑”이라고 부르던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던 롤랑 바르트의 심회와, 노쇠해가는 ‘엄마’의 일상을 담은 한설희의 사진들이 심안(心眼)을 찔러오며(punctum) 일으키는 날카로운 묵중함과, ‘엄마’와의 지난 시간과 남은 시간을 헤는 나희덕 시인의 현재에 대한 감사와, 거동을 폐하고 자리를 보전하는 엄마의 눈빛만을 어루만지는 어떤 마음이 모두 일렁인다.


조강석(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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