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주름들』 리뷰: 그리는 선, 지워내는 선 / 마준석

1.

우리는 이제 예술작품이 감상자와 관계없이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아직 읽히지 않은 시 한 편, 또는 보이지 않은 하나의 그림이란 무엇인가. 실상 아직 쓰이지 않은 것, 그리고 그려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작품을 감상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은 쓰인 것이 혹은 그려진 것이 된다. 따라서 작품은 언제나 감상자를 요구한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 주름들』은 매우 귀중한 역할을 수행하는데, 로스코나 칸딘스키 같은 대중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작가뿐만 아니라, 더 주목받아 마땅한 여러 작가들을 한 데 엮어 소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희덕의 단정한 소개를 경유하여 작품에 다가가고, 그렇게 작품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게 된다.

『예술의 주름들』은 나희덕 자신의 시적 감응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책 아래에 흐르는 그의 생각 또한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 가장 주의를 끄는 것으로는, 그의 “선線”에 대한 고려다. 선은 무언가와 다른 무언가를 잇는 관계를 상징함으로써, 우선 긍정적 이미지로 제시된다. 예컨대 선은 분열된 대지를 다시 꿰매는 “실”이자, 장벽이라는 경계선을 오히려 길로 열어내는 “걷기”다.(45) 또한 선은 집의 얼굴들을, 나아가 나의 자아를 이어내는 “산책길”이다.(263) 게다가 선은 세계를 긴밀하게 직조하는 복합적인 “거미줄”이자(104), 행성들 사이의 우주적 “망”이기도 하다.(30)

단순히 관계를 찬미하고 만남의 기쁨을 노래하는 것으로 글을 닫는다면, 사실 그리 특별한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희덕의 탁월한 점은, 그 이어짐을 분절한다는 것에, 즉 선을 다시금 반성하는 그의 섬세함에 있다. 선은 본디 양면성을 지닌다. 선이란 내가 타자로 뻗어나가는 이어짐의 운동이지만, 동시에 빠르게 뻗어나가며 오히려 타자를 소거하기도 한다. 이러한 역설이 “도로” 위에 있다.(50) 우리는 잇기 위해 도로를 놓지만, 도로는 굉음 속에 다른 생명을 치고 지나간다. 나희덕은 이러한 선의 양면성을 명시적으로 짚는데, 치하루의 작품에서 실은 “존재와 존재를 이어주는 ‘끈’인 동시에 몸에 날카롭게 박힌 ‘창’”이다. 또한 실로 엮어냄은, “감싸고 보호하는” 것이자 동시에 “가두거나 은폐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107)

시오타 치하루, 「Between Us」

시오타 치하루, 「Between Us」
내 피로 뽑아낸 붉은 거미줄은
누군가에게
거처가 되기도 하고 덫이 되기도 했으리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거미들은 희미한 진동을 따라 움직인다
피의 만다라에 마악 도착한 어떤 날개를 향해
날개가 파닥거리는 동안
빈혈의 시간은 잠시 수런거리다 고요해진다
― 나희덕, 「붉은 거미줄」(부분)

거미줄의 선은 거처이면서 동시에 날개가 걸리는 덫이며, 거미는 거미줄을 타고 매끄럽게 날개에 도달한다. 파닥이는 날개는 거미와 이어진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잇는다는 것은 어떠한 중요성도 가지지 못한다. 핵심은 선이 지닌 두 가지 양면적인 계기를, 즉 관계맺음 자체가 내포한 역설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본질적인 역설을 결코 제거할 수 없다. 다만 우리가 나희덕에게서 배울 수 있는 점은, 끊임없이 선을, 나아가 역설을 분절하려는 태도다. 관계맺음이 지닌 구원과 폭력을 올곧게 직시하면서, 예술을 통해 이 둘을 함께 접어내는 태도. 접힌 선은 세계의 ‘주름’이 되고, 그 주름으로부터 세계는 다시금 펼쳐질 것이다. 주름 잡힌 세계에 대한 염려가 나희덕의 끈질긴 글쓰기를 추동하고, 나는 이것이 그의 윤리의 본질을 이룬다고 믿는다.

2.

흥미롭게도 선은 단순히 타자와의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선은 또한 ‘개체화’라는 존재론적 원리를 수행한다. 사물의 “외곽선”을 구성하는 드로잉의 선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219) 선이 타자와의 이어짐이자 동시에 한 개체에 형태를 부여하는 테두리라는 것은, “자아”를 구성함에 있어 타자가 필연적으로 요청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263) 즉, 타자와의 관계가 바로 주체의 개체화의 원리다.

하지만 여기서 몇 가지 짚어볼 점이 있다. 먼저, 관계를 주름내야 한다는 그의 염려가 관계를 과하게 주제화하고 강조함으로써, 오히려 관계 자체를 너무 뚜렷하게 현전하게끔 한다. 이러한 점이 나희덕을 만남을 서정적으로 노래하는 시인 정도로 피상적으로 읽히도록 한다. 또한 관계는 개체의 테두리라는 점에서, 관계의 뚜렷함은 개체의 뚜렷한 존재를 확보하려는 태도로 이어진다. 예술이란 사라짐에 저항하여 존재들을 되살리려는 노력이라는 것(26), 혹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려는 노력이라는 그의 서술에(30) 이러한 태도가 스며있다. 테두리를 잃고 사라지는 무엇들에 뚜렷한 선을 다시 기입하여, 그 무엇을 보다 존속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나희덕이 하루빨리 만남을 이룩하려는 조급함에 손쉽게 자신을 내맡기지 않았음을 안다. 또한 스러지는 무엇이든 전부 예술로 다시 건져낼 수 있다는 낙천적인 믿음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안다. 하지만 그는 분명 관계의 힘을 믿고 있으며, 관계의 테두리를 둘러 다시금 존재를 확보하는 예술의 권능을 믿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문학은 사라지는 그 무엇과 관계할 수 있는가. 혹은 어떻게 바깥으로 추방된 실존을 대신하여 말할 수 있는가. 참담하게도, 결코 할 수 없을 것이다. 언어는 사물을 살해하는 한에서만, 우리에게 한 줌의 빈곤한 존재를 허락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언어로 타자를 오롯하게 받아낼 가능성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언어가 야기하는 소외가 놓여있다. 문학이 언어가 매개하는 사건인 이상, 작품은 읽는 이를 속일뿐더러 쓰는 이조차 기만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거대한 헛발을 내지르는 것에 불과하다. 결코 구할 수 없는 것을,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건져내려는 착각. 예술이란 애초에 하잘 것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떠한 권능도 없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Diego」

따라서 예술가는 반대로 오직 지워짐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지워짐을 견뎌내는 인내심을 통해서만 예술의 지저분한 본래성에 저항할 수 있다. 예컨대 자코메티의 초상화는 다양한 모델을 두고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모델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닌 차마 쳐다보기 쉽지 않은 누군가가, 남자도 아닌 여자도 아닌 누군가가 꿰뚫는 시선만이 가득하다. 단 하나의 선을 긋는데도, 자코메티는 긋고 지우고 긋고 지우고를 수없이 반복하면서 선은 오직 흔적들과 난잡한 겹침으로만 그려지는데, 그림이 혼란스럽고 지저분해질수록, 이상하게 시선은 더욱더 진하게 고정되어 나를 사로잡는 것이다. 자코메티는 선의 끈질긴 불확실을 견디며, 선을 통해 선을 지워내고자 했다. 그리고 이 지워짐 속에서 도리어 이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출현한다.

따라서 사라지는 것에 테두리를 그어 옭아매기보다는, 지워지는 것을 지워지게끔 해야한다. 이 점에서 나는 나희덕과 갈라진다. 우리는 말을 말로 긁어내면서, 언어가 침묵으로 돌아가는 지점까지 견뎌내야만 한다. 물론 그 침묵은 실상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은 채, 어둠이 다시 어둠으로 열리는 미결의 밤 속으로 우리를 던져놓겠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시란, 그리고 모든 예술작품이란 실패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예술은 작가의 내밀한 고백을 배신하고, 그를 다시금 작품 바깥으로 추방한다. 시인 자체를 이루던 그의 내밀한 경험들은, 시 속에서 더이상 그의 것이 아닌 중성적인 무언가로 변모하고, 끝내 껍데기만 남은 작가는 작품의 이 강탈을 견뎌내지 못한다. 어쩌면 『예술의 주름들』은, 자신의 시가 강탈해간 내밀함을 다시 긁어모아 붙잡으려는 나희덕의 초조한 고집인 것은 아닐까. 다른 작가의 작품들에서조차 자신의 흩어진 말들을 찾으려고 뒤적거리면서 말이다. 그 초조함이 그의 미덕이자 과오일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떠하랴. 나는 예술만큼 해괴한 것도 없고, 예술가만큼 성가신 이들도 없다고 생각한다. 나 잘 살고 있는데, 자꾸 시부렁거리며 신경 쓰이게 한다. 시 한 편을 읽느니 차라리 잠이나 더 자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 하등 쓸데없는 예술의 중얼거림이, 자꾸만 귀 뒤에서 침대 머리맡에서 바스락바스락 사각사각 울려 퍼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만 자고 내일 아침은 공부해야지 되뇌면서도, 또다시 나는 윤형근의 흙빛을 떠올리고 사카모토의 선율을 듣고 앉았다. 참 알 길 없는 노릇이다.


마준석(연세대 철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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