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풍차』(1953),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소설
이종극(李鍾極, 1907~1988)의 『무한풍차(無限風車)』는 공법학자인 이종극이 “펜네임” ‘이관’이라는 필명을 내세워 쓴 소설이다. 소설 결말부 마지막 장에 “1953. 3. 8”이라고 날짜를 기입해놓은 것으로 보아 그때 완성된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신문이나 잡지 연재가 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1954년 ‘신지사(新志社)’에서 발행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종극 『무한풍차』를 중앙경찰학교 교장직을 수행한 1950년 구상하기 시작해 1951년 내무부 치안국 교육과장 시절과 1952년 신흥대학(現 경희대) 교수직을 수행하는 동안 틈틈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시기와 정확하게 겹쳐진다. 즉, 전쟁이라는 급박한 사태의 와중에서도 이종극은 남한 단독 정부가 확립한 헌법에 대한 수호 의지와 법률 지식과 교양을 문학을 통해 전파하겠다는 사명을 내려놓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공법학자의 소품 격으로 알려져 그간 1950년대 문학사를 구성하는 목록에서 배제됐다. 물론 이종극은 법학 관련 저술을 더 많이 남겨 『무한풍차」를 제외하고는 다른 문학작품 창작 이력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한풍차』는 대중교양으로서의 법학 지식을 보급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남성-지식인이 그것을 매우 직접적인 언어들로 소설화한 드문 사례이다. 『무한풍차』에 대한 문학성을 논하기 전에 그 내용의 심부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종극은 헌법 지식을 대중화해야 한다는 사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인물이다. 이종극과 『최신법학통론』(1953)을 함께 쓴 전봉덕이 “사람이 한 평생을 두고 애써가며 얻은 심오한 학리를 담은 학술서는 당연히 난해하다. 이것을 일조일석에 알아내려 함은 너무나 뻔뻔한 일이 아니냐”고 말할 때, 이종극은 “저술의 목적은 지식의 전달에 있으므로 아무리 심오한 학문일지라도 독자가 알아볼 수 있도록 평이하게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전봉덕, 이종극, 「최신법학통론 발행에 부쳐」, 『조선일보』 1953. 6. 30) 전봉덕은 해방 이후 최초의 법학 교과서인 『법학통론』(1947)을 쓴 인물이고, 이종극은 정부 수립 이후 현행 법령의 근거 위에서 최초의 법학 교과서인 『신법학통론』(1950)을 쓴 사람이다.
식민지 시기 이종극은 중등교원 임용에 통과해 ‘훈도’가 된 이후 고등문관시험 예비과와 행정과를 모두 통과하고 행정관료로 임용돼 군수직 등을 수행했으며, 해방이후에는 법학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해 공법학 교수가 되었고 훗날 여당 국회의원, 언론사 논설주필로도 활동했다. 5.16 이후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으로도 활약하였다. 이종극은 20세기 전환기 식민지 조선과 대한민국의 주요한 역사적 국면에서 모두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남성-지식인의 전형이기도 했다.
즉, 공법학자이기도 하지만 현실정치에 밀착해 출세지향적인 행보를 거듭한 이종극은 법률지식을 문학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달하려는 사명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종극의 이 같은 면모는 당대의 대중들의 법 인식 수준에 대한 권력자와 지배층의 태도를 적극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며, 1950년대 한국 사회에 법과 제도의 안착 과정을 하향식으로 배당하거나 이식한 모델이기도 하다. 이종극의 『무한풍차』는 “빛나는 공화국”의 개시와 제정된 헌법을 구름판 삼아 도약하는 자유와 민주의 가치가 만개하는 시민사회를 기대하는 남성-엘리트의 희망을 반영하는 텍스트로 볼 여지가 있다.
『무한풍차』의 시간적 배경이 1970년대라는 미래로 설정된 이유는, ‘유토피아’의 모순된 두 개념을 모두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현실에 없는 곳’이자 동시에 ‘도달해야 할 이상향’으로서의 신생공화국의 미래를 상상하는 감각은, 실상 당대 제정된 헌법의 가치를 수호해야 할 지도층의 책임감 및 의무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에 합당한 대중사회의 응답을 요청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무한풍차’라는 영구동력을 가동시키는 방식으로 미래를 구상하는 일이란, 현재에 존재하지 않고 근미래에도 도래하기 어렵겠지만 완벽한 사회를 상상하는 방법의 일환이었다.
더욱이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상상하는 방식의 서술은 현재의 정치적 책임을 가볍게 만드는 효과도 있다. 제헌 헌법이라는 법률적 기초에 의거해 건설된 국가가 자행한 퇴행적 반법치주의 행위들에 대한 책임은 뒤로 미루며, 공화국의 헌정 질서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실제로 당시 이승만 정부는 온전한 국가성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아래(‘민(民)’)로부터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시민사회가 동시에 형성돼야 했다. ‘좌우간의 정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해방공간을 지나, 단독 정부 수립 이후 합의된 ‘자유’와 ‘민주’의 가치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활규범 차원에서도 급격히 이데올로기화되었다.
1950년대 접어들어 헌법은 새로운 체제를 구성하기 위한 성격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통해 만들어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적용된 법규범으로 변화해야 했던 것이다. 지배층 남성-지식인이 신생 공화국의 미래상을 헌법 지식의 계몽을 통해 구상한 것은 이 때문이다. 즉, 『무한풍차』는 ‘이데올로기화된 자유와 민주’의 개념이 생활규범화 되는 단계에 있어 일종의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위한 의도로 쓴 소설로 볼 수 있다.
다만 입신 출세주의자가 정치공학적으로 써낸 소설이라는 폄하 이전에 다른 감각으로 이 소설을 보아야 하는 이유도 있다. 당시 제헌이 표상하는 정치성의 근거와 신생 공화국의 시민들이 받아들이는 국가의 의미, ‘자유’와 ‘민주’, ‘공공성’의 개념을 제헌의 그 순간으로 되감아(rewind) 다시 생각할(remind)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공법학자가 쓴 소설이 관심을 얻고, 재판을 발행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는 사실은, 헌법이 정의하는 민주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 정치적 결사와 행동 의지가 1950년대 소설의 새로운 미학 기준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종극은 헌법이 마련하고 있는 규범적 가치들을 사회에 안착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를 참조하는 방식을 택한다. 다음은 미국 국무부 감독관 ‘헨더슨’이 한국의 헌법과 한국인의 법 관념에 대해 평가하는 대목이다.
「미국 사람인 내가 한국 사람을 비평하는 것 같애서 말하기가 좀 안됐지만, 한국인은, 헌법 · 법률을 지켜야겠다는 준법사상이 박약하다. 우리 미국사람이나 영국 사람은 민주주의 헌법을 손에 넣기까지에 수백년이란 세월을 허비하고 무수한 사람이 피를 흘렸기 때문에, 헌법을 생명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은 어떠냐 하면 제이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이 승리한 결과 아주 쉽사리 큰 희생이 없이 헌법을 쥐게 되었다. 무슨 물건이라든지 댓가 없이 얻은 것이면 낮추어 평가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준법사상이 박약한 것은 헌법에 대한 문제와는 또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법률은 국민 각자가 대표자를 통하여 제정한 법칙이요 자기의 양심이 거기에 결정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때문으로, 법을 지키는 것은 곧 자기의 양심을 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오래동안 전제정치 아래서 지배자가 제멋대로 제정한 법률을 강요당해 왔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법을 회피하는 것이 자기의 이익이라 하는 생각이 뿌리 깊이 머리에 박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의 법률도 국민이 제정하고 있음에 불구하고, 아직 옛날과 같은 생각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이관, 『무한풍차』, 신지사, 1954, p. 356~357)
이종극에게 참조의 대상은 늘 영국과 미국이었다. 실제로 이종극이 남긴 헌법 관련 저작들의 대부분이 영국과 미국의 제도와 비교해 한국 헌법의 의미를 대조하는 방식으로 작성됐다. 엄상섭은 이종극이 1953년 쓴 『헌법정의憲法精義)』에 대해 “영미의 저서를 참고”하여, “일본 구헌법적인 관념의 청산에 노력”한 결과라는 감상을 독후로 남긴 바 있다.(엄상섭, 「이종극 저 <헌법정의>를 읽고」, 『동아일보』, 1953. 1. 7~9) 이종극이 영국과 미국을 끊임없이 참조했던 까닭은 한국 헌법의 보편화 욕망을 반영한다. 이상적인 외부의 모델을 상정하고, 그에 맞게 자신의 체제와 규범을 조절하는 것이 후발 신생공화국이 마땅히 취해야 할 자세로 본 것이다.
한편 엄상섭은 이종극 못지않게 당시 제정된 헌법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인물이다. 엄상섭은 “헌법은 민주주의 정치원리의 법제도적 표현”이라면서도 강제성보다 규범성을 내세워 헌법의 가치를 평한다. 이종극 역시 헌법의 규범성 성격을 강조하며, “헌법은 국법체계 속에서 최고의 단계에 위치하며, 형식적으로 최상의 효력을 갖는 법규범이다”면서도 “헌법은 국민의 생활 속에 존재하면서 국민의 일상생활에 의해 실현되고 발전되는 생활규범”으로서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물론 이 같은 강제력 없는 헌법의 규범성은 헌법의 기능을 단순히 정치권력의 제한이나 좁은 의미의 정치권력을 구성하는 제도가 아니라 시민들의 정치적 삶을 구성하는 공동체의 근본가치에서 찾는 것이기도 하다. 헌법을 시민들의 정치적 삶을 구성하는 기제로 이해하는 사고방식의 이면에서는 헌법을 이해하는 독특한 시각이 전제되어 있다. 바로 헌법을 정치공동체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질서가 발전한 결과로 보는 시각의 반영이기도 한 셈이다.
그런데 이처럼 “규범성의 생활화”를 강조했던 것과는 달리 이종극은 대통령이라는 최고권력자의 덕성과 노력이 당대 한국 사회의 변화와 개조를 앞당길 것이라는 기대를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무한풍차』 전반부를 비롯해 전면을 장악하고 있는 주인공은 대통령 ‘정가록’이다. ‘정가록’은 정치학자 출신으로 덕망이 높고, 사욕이 없으며,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인물이다. 지도자 개인의 독자적인 능력으로 국정을 쇄신하고 헌법이 상정하는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무한풍차』의 주요 줄거리이다.
즉, 『무한풍차』는 ‘정가록’이라는 개인의 리더십과 정치력에 의존해 대한민국의 성장과 진보를 기대하게 하는 소설이라 말해도 무방하다. 이종극이 외부를 참조해가며, 또 생활규범으로 이식하려했던 법 관념은 실상 이상적인 지도자를 통해 실현되는 체제에 불과했다. 이종극이 지도자 개인의 능력과 덕성에 의존한 헌법 통치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체로 보는 관점은 한국 정치사의 오랜 인물중심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이승만 대통령 집권부터 오래도록 이어져 온 한국 특유의 “보스정치”를 승인하고 예견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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